Longing. Green.
일상생활 2006/10/16 02:50 |1.
"어라? 갑자기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을까. 이것 좀 봐."
문득 너는 눈이 동그래져서 내 앞에 제 손등을 들어 보였다.
나는 모니터에 두고 있던 시선을 잠시 돌렸다가 순간적으로 질겁해서, 내 눈 앞의 네 손을 움켜 잡았다.
녹색.
짙은 풀물이 든 것 같은 녹색이 너의 다섯 손가락 끝에 선명하게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녹색은 네 손가락 끝에서 거의 소름끼칠 정도의 강렬한 녹색으로 시작되어 손톱이 끝나는 한 마디 정도까지 계속되다
서서히 옅어지면서 사라지고 있었는데, 덕분에 너의 손톱들까지도 모두가 빛나는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이거 뭐야? 뭐 묻은 거 아냐?"
초록 계통의 색은 그게 깃털이나 눈동자 부분이 아닌 이상 동물들 -인간도 동물이니까- 은 띠지 않는 색이라고 알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그것이 그저 표면에 묻은 정도의 것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네 손가락의 투명한 피부 표면 아래로 그 기묘한 녹색이 비쳐 보였다.
"뭐야...우와...아프진 않아?"
너는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 보더니 귀찮아지겠다 싶었는지, 곧 내게 잡힌 제 손을 빼내 버렸다.
"안아파. 뭐 별거 아니겠지..."
짐짓 가볍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리고 읽고 있던 잡지에 다시 집중한다.
나는 그런 너를 한참 바라봤지만, 뺨 위로 흘러내린 네 머리칼에 가려서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2.
아마 몇달 전부터였을 것이다, 네가 늘 입에 달고 살던, 그에 관한 얘기들이 뚝 끊어져 더이상 나오지 않게 된 것은.
지난 몇년간 너의 연인이었다던 그는 그즈음 자신의 일에 바빴는지 무심해진 건지, 아니면 네가 그런 쪽이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너희는 더이상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않았었다.
너는 관계의 변화에 초조해 하는 듯 보였지만, 그러나 뭐, 친구로서 내가 보기에 넌 그런대로 귀염성있는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나는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마침내 어느 날 밤 너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돌아왔고, 불꺼진 방에서 내게 돌아누운 채 밤새 훌쩍였었다.
그리고 그 후 다시는, 간혹 집으로 전화를 걸어 너를 찾던 그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넌 간혹 받지 않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거나 하며 혼자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네가 기다리던 연락을 받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후로도 너는 내게 그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3.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너는 변했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미묘하게.
네가 발랄하고 귀여워 보였던 것은 순전히 그가 있기 때문이었을까. 널 아는 모두에게도 그렇게 보였던 것일까.
어떻게 한껏 차려입고 나갔다가도 너는 어쩐지 축 처진 모습을 하고 돌아왔고, 너 자신도 모두에게 무관심해지는 것 같았다.
너는 집에 돌아오면 방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말이 적어졌고 안색이 어두워졌고 신경안쓴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났다.
너는 더이상 예전의 잘 웃고 말많고 쾌활하던 귀여운 여자아이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그렇게도 네게 있어 큰 부분이었던 것일까, 나는 너에게도 그에게도 조금은 속이 상했다.
4.
좀더 시간이 지나자 너는 조금씩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밤낮으로 누군가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떨며 웃기도 했고, 내 옷을 빌려 입고 외출을 하기도 했다. 넌 다시 새 화장품을 사고,
문득 옷장에서 옷가지들을 꺼내 놓고 정리하기도 했다. 전혀 생뚱맞은 시간에 갑자기 대청소를 하자며 부산을 떨기도 했다.
가끔은 다시 우울해져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네가 다시 밝아진 것 같아 나는 마음이 놓였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네가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도 알 수 없이, 정말이지 당황스럽게도.
5.
너의 손 끝에서 시작된 녹색은, 우리들이 바랬던 것처럼,멍이 빠지듯이, 서서히 옅어지다가 사라지거나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게 처음 네가 네 손을 보여준 후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녹색은 네 손가락 두번째 마디까지 맹렬하게 번져갔고,
일주일쯤 뒤가 되자 그 기묘한 녹색은 너의 작은 손바닥까지 점령했다.
계절은 아직도 후덥지근한 여름이었고, 너는 계절에 맞지 않는 장갑을 끼면서까지 외출하려 하지는 않았다.
다시 집에 틀어박히게 된 너는, 자주 제 양 손을 들여다 보며 걱정어린 얼굴을, 또 때로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내 말들은 고집스럽게 무시해 버리곤 했다.
"이상하지.. 왜 이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놔둬야 할 거 같아. 왠지."
너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녹색은 점점 너의 몸에 넓게 번져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색을 어디서 보았는지 알았다. 그건 여름의 한창 무성한 나뭇잎들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녹색이었다.
이제 너는 온통 녹색이었다. 당장이라도 네게서 싱싱한 녹색의 잎들이 살을 뚫고 나와 자랄 것만 같이 보였다.
녹색의 네가 나는 무섭다기보다,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6.
깊은 밤.
네가 흐느껴 우는 소리에 나는 잠을 깼다. 돌아보니 너는 어두운 방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네가 들고 있는 휴대폰의 화면이 어슴푸레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어떡해? 어떡해? 나 계속 변해 가는데... 받질 않아. 계속 받질 않아..늦기 전에 직접 무슨 말이든..해야 하는데."
너는 소리내어 울면서, 휴대폰의 버튼을 계속해서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대답없는 그 번호였다.
네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져 녹색인 손등을 적시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사실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제 그에게 이미 지금 너의 전화는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젠 너무 오래 지났다.
하지만 절박할, 그래서 그렇게 울고 있는 너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너를 다독였다.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 자나 보지... 내일도 있잖아... 내일 연락해. 내일 밝을 때. "
하지만 너에게 내일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방 안은 온통 처음 보는 녹색 잎사귀들로 뒤덮여 있었고 내 옆에 잠들었던 너는 없었다.
결국 네 속에 그 녹색이 가득가득해지다가 마침내는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오고야 말았던 것일까
7.
그는 얼굴이 약간 야위긴 했지만 말끔했다.
"무슨 일이야. 그애가 너한테까지 연락해 보라고 시키던가 보지. 이제와서..."
그는 나를 보자 무표정하게 그렇게 말했지만, 어조에는 어쩐지 한숨이 섞여 있었다.
"아니야. 걔는 이제 연락 안할거야. 그냥 내가 연락한 건데."
의아해 하는 그에게 나는 들고 있던 종이백을 내밀었다. "이걸 전해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종이백 안에 든 것을 보고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나뭇잎이잖아. 근데 이걸 왜..."
"글쎄, 그냥 걔가 너한테 갖다 주길 바랄 거 같아서. 아무튼 받아줘. 버린대도 할 수 없지만."
그리고 나는 어리둥절해서 종이백을 받아 든 채 서 있는 그를 놓아두고 돌아섰다.
8.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문득 어쩐지 그의 손 끝에서 희미하게 그 낯익은 녹색 기운을 본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으로 그려 보겠다고 써놓은지는 좀 된 이야기.
언제나 어떤 것이든지 당장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너무 늦어 버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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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 완료했습니다. 결국 녹색의 정체는 모르고 목화(木化) 현상으로 끝나는 것 같군요. 여운을 남기는 것 같아 좋긴 합니다... '그' 마저도 녹화되는 것은 한(限) 때문인가요? ^^;
음.;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흑흑.
이렇게 글 뿐인데다 미숙한 이야기구조인 것을...
제가 제꺼에 해설을 달면 왠지 민망하고 웃기니까;
그냥, 이 글은 제가 한창 실연의 아픔이 아주 진하던 때에 썼던 이야기랍니다.^^
전에 썼던 대로 녹색은 그리움, 갈망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네요~
다만 그게 억누르면 저렇게 목화;되는 것일까요. 음음;;;
그런데 지금은 또 심리적으로 약간 다른 시점이라, 만화로 그린다 해도 그때와는 또 기분이 달라서
제대로 그릴 수 있을지 어떨지....;좀 망설이게 되네요.
만화를 보면..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단 생각이 들어서 더욱 흥미진진해지네요.
어쩜 그렇기 때문에 우니님 특유의 감수성이(만화에서) 진하고 깊은 향을 내고 있는걸지도요.ㅎㅎ
comix쪽을 쭉 너무 재밌게 봤는데요,
마치 연애담이 적힌 다이어리를 훔쳐보는 듯한 기분도 들었답니다.ㅎㅎ
p.s
식상할지도 모를 사랑이야기를
캥거루란 매개체를 이용하여서 무척 독특하기도 하고 몽환적이기도 한 캥거루 이야기가 무척 좋았어요.
언제쯤 만화가로 대뷔하시나요!ㅎㅎ
꿀꾸리님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라 그런지, 마치 잘 모르는 사람같은 말투로 말씀하시는군요!;
만화에도 그림에도 뭣에도 심히 자기 내면이 묻어난단 소리.. 많이 들었죠.
좋은 부분일 수도 있지만 제 내면이 좁아터지고 치사할 경우에는 양날의 검이겠네요ㅡ_-;;
훔쳐보는 기분이었다니 그건 곤란해요 아하하.
만화가라..분명 원고할 당시 꿈이었기는 한데, 과연 될 수 있을까요;
나름 신비주의 컨셉( 퍽퍽퍽 ) ^ ^; ㅋㅋㅋ 실명보단 우니님이 좋지 않으세요? 어떠세요
넵- 오프라인에서는 실명을 가진 사람이지만,
왠지 오래전부터 온라인에서는 저는 우니입니다. 왠지 실물과는 별개의 캐릭터이기도 하죠;;;
신비주의 컨셉. 크크크;
포스팅과는 상관없는 질문 하나요- 저도 피드버너 쓰면서 맨 아래 나온 것 같이 구독자 표시 배너를 다는 방법을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ㅜㅜ 어떻게 하면 되죠?
앗..571bo님도 피드버너 사용하고 계셨군요
아래에 저 구독자 수치 카운터(?)는 피드버너 사이트에서 제공한답니다. 카운터 기능도 기능이지만, 왠지 이뻐서^^;;
피드버너 사이트에서 로그인하셔서 my feeds를 여시고, 해당 피드 제목을 클릭하시면 세번째 탭 publicize라고 있죠?
거기의 메뉴들 중에 위에서 다섯번째, FeedCount™가 저 카운터를 제공하는 메뉴랍니다.
활성화시키시고, 카운터와 글씨 색상을 입맛에 맞게 수정하셔서 사용하세요.
피드버너도 참 뭐 설정하고 할 수 있는 게 많아서 즐겁죠?
감사합니다- ^^
호오, 이런 이야기였군요.
결국 남자도 같은 모습으로~
느하하...
그 당시 생각은 "남자 쪽이 조금 더 느리긴 하지만 결국 같을 거다" 라는
뭐 그런 생각이었지요.;;;